Simply Me
완도군 자전거 투어링 #1 완도로
27 May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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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오랫동안 자전거를 못탔다. 아니 안탔다. 겨울엔 추워서 안탔고, 여름엔 더워서 안탔고. 미세먼지가 많아서 안탔고, 바람이 불어서 안탔다. 특히나 자전거 여행은 무척 고단한 일이다. 그 고단함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의 준비가 있기 전까지는 실행할 수 없다. 자전거 여행을 할 때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라는 질문이 올라오고 그리고 한동안은 자전거를 타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 그러다 또 때만 되면 슬금슬금 올라온다. 자전거에 앉아 천천히 페달을 밟으면서 풍경에 감탄하는 그 순간이, 삐질삐질 땀을 흘리고 언덕을 오른뒤 바람을 가르며 내리막을 내려가는 그 짜릿함이 그리워진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 때가 왔다.

제주에서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목포, 완도, 고흥, 여수, 부산, 해남 등을 놓고 검토하다가 완도행 배편이 행사중인 것을 발견, 제주에서 완도 왕복 티켓을 15천원에 득했다. 여기에 터미널 이용료 3천원과 자전거 요금 6천원을 추가해도 24천원이다. 시간대가 좀 애매하긴 했지만 시간 부자인 나에겐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완도에서 보길도 청산도를 둘러보기로 했다. 두 군데 모두 가본 곳이지만 왠지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스 연구도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기록도 거리도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가민Garmin 대신 일반 전자 시계를 차기로 했다.

가장 먼저 오랫동안 묵혀둔 자전거를 손봐야했다. 리어랙은 나사가 하나 빠져 덜렁거렸고, 체인도 녹이 슬었는지 이상한 소리가 났다. 드르륵 덜덜 거리는 자전거를 끌고 조천에 있는 자전거 샵으로 갔다. 5천원을 주고 리어랙 나사를 조이고 체인을 다시 끼우고 오일링을 하고 나니 살랑살랑 잘도 굴러간다. 역시 자전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자전거 수리 중
자전거 수리 중

자전거는 이제 됐고, 장비. 어랏. 가장 중요한 헬맷이 없네. 이럴 줄 모르고 서울에 놓고 왔다. 궁리끝에 공항에서 아빠한테 공수 받기로 했다. 튜브도 없고 공구도 없고 이번 여행 이래저래 뭔가 좀 부족하긴 하지만, 나머지는 완도에 가서 해결하기로.

마지막으로 한쪽 페니어엔 캠핑 도구를 챙겼다. 텐트, 침낭, 코펠, 버너. 매트가 없어서 담요로 대신하기로 했다. 다행히 페니어 하나에 다 들어갔다. 다른 페니어에 갈아입을 옷 한 벌과 약간의 식량 등, 남은 잡동사니를 쓸어 넣었다. 이번 여행엔 왠지 그림을 그리고 싶어질 것 같아 스케치북과 물감도 챙겼다. 준비 완료.

완도로

오전 내내 비가 왔다. 바람도 거셌다. 제주 공항엔 윈드시어·강풍 특보로 항공기가 결항되고, 선박 운항도 통제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제주항 홈페이지를 확인해보니 대부분 결항. 오후엔 개일거란 얘기에 오후까지 기다렸다가 해운사에 전화를 해보니 다행히 내가 타고 갈 20시 30분 실버클라우드는 정상 운행될 예정이라고.

비가 그쳤길래 눈누난나하며 14시30분에 출발했다. 책이 한 권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도서관에도 들렀다. 보기만 해도 잠이 올 것 같은 제목의 책을 한 권 빌렸다. 두껍지만 가벼웠다. 안 읽더라도 베개로 쓰면 되겠다 싶었다.

비가 그쳤다고 좋아했더니 도서관을 출발하자마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를 맞으면서 달렸다. 비를 가르며 자전거를 탈 땐, 매우 특별해진 기분이 든다. 젖은 옷은 비가 그치면 또 금방 마른다. 두 시간쯤 걸려서 공항에 도착했다. 아빠한테 핼멧과 우비, 그리고 몇 가지 공구를 전달 받고, 배 시간까지 시간이 좀 남아 아빠 일당과 우진 해장국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나왔는데 비는 계속오고 날도 어두워졌다. 어르신들의 걱정스러운 표정 섞인 배웅을 받으며 출발.

안내 받은대로 제3부두에 도착하니 멀리 큰 배가 하나 보였다. 실버클라우드 엄청 크구나. 아저씨들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 자전거를 화물칸 안쪽 공간에 실었다. 이따 방송이 나오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면 된다고 설명도 해줬다. 가벼운 마음으로 셔틀버스를 타고 여객 터미널로 이동.

실버클라우드
실버클라우드

실버클라우드는 지금까지 타 본 배 중 가장 큰 것 같았다. 게다가 완전 새 배. 언제 출발했는지도 모르는 사이 배는 이미 항해 중. 골까지 덜덜거렸던 부산행 페리에 비하면 완전 퍼스트클래스였다. 배는 좋은데 객실은 무작위로 배정했나보다. 낯선 남자들이 대짜로 뻗어있는 장면 안에 선뜻 들어가고 싶지는 않지만, 뭐 2시간 30분이니까. 배를 긁던, 대짜로 뻗어서 자던 상관없다. 나한테 청각적 후각적 촉각적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된다. 지정 받은 3등석 방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책을 읽으려고 꺼내드니 객실의 TV 소리가 신경쓰였다. 그냥 드러누워 시간을 보냈다.

자전거 증발

11시가 넘자 차량 선적한 사람들 내려오라고 방송이 나왔다. 화물칸으로 내려가 자전거를 실은 배의 뒤쪽으로 가보니 뭔가 이상하다. 아까 그 공간이 없다. 뒤가 아니라 앞 쪽이었나? 100미터가 족히 넘는 배의 앞쪽으로 가서 살펴봤지만 거기도 없다. 사진까지 찍어놨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그렇게 생긴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내 자전거는 없다. 다른 배에 실은건가? 오마이갓. 설마.

다른 층에 실은건가? 한 층으로 올라가 승무원에게 물으니 여긴 아무것도 안실었다고, 실었으면 아래층에 있을거라고, 그 시간에 제주항에 있던 배는 이 배 뿐이니 다른 배는 아닐거라고 위로해준다. 없다고 내가 양쪽을 다 찾아봤는데 못찾겠더라 했더니 여직원이 같이 가잔다. 함께 내려와 배의 앞쪽으로 가서 살펴봤지만 자전거는 없다. 자전거를 싣고 찍어둔 사진을 보여주니 고개를 갸우뚱. 무전기를 들고 어쩌고 하더니 뒤쪽 끝으로 뛰기 시작했다. 점처럼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뒤 따라 갔지만 아무도 없다. 자전거도 사라지고 직원도 사라졌다. 헐. 나는 저주의 배에 탄 것인가?

뛰어가는 직원
뛰어가는 직원

어떻게 하지? 가만히 서서 눈알을 굴리고 있는데 하얀 철 벽에 붙은 작은 금색 표지가 보였다. ‘자전거 보관소’. 그 표지 아래 금고문 같은 작은 문 하나. 유레카! 냉장고 문처럼 생겼지만 저 안에 내 자전거가 있을 것이 틀림 없었다. 관계자외 출입금지 구역이자 자전거 보관소라니. 그나저나 굳게 닫혀진 문을 어떻게 열어야 할까? 누가 좀 도와주세요! 허공에 소리치다가 관두고 문에 달린 두 개의 레버를 이리 돌렸다 저리 댕겼다 하다보니 덜컹하고 문이 열렸다. 할렐루야.

자전거는 방 안에 안전하게 잘 묶여져 있었다. ‌휴. 십년 감수했다. 그저 배 뒤쪽의 한 쪽 구석이라고 생각했는데 문이 달린 방이었다. 정확히 보지 않고 늘 그렇듯 비슷한 곳, 뒤쪽 어디라고 생각했던게 잘못이었다. 자전거 여행 왔는데 자전거를 잃어버리면 어떤 기분일지 체험했다. 정신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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