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로
완도 시내에 있는 찜질방에서 하루밤을 보냈다. 예전엔 찜질방에서도 잘 잤는데 이제 예민해진건가, 누군가의 코코는 소리를 따라 세며 한참 뒤척이다가 간신히 잠이 들었다. 잠을 잔건지 만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눈꺼풀은 붙였다 뗐다. 사람들이 일어나서 떠드는 소리에 나도 깼다. 더 자고 싶지만 더 자면 뭐하리. 오늘 밤 또 잠이 안올까봐 일찍 자리를 털고 나왔다. 목욕을 하러 내려가니, 온 동네 할마시들 아침에 목욕탕에서 모이시는가 탕이 북적북적. 소도시의 목욕탕은 시설로만 보면 진작 망했을 곳이지만 굴러가는 걸 보면 외지인이 아닌 동네 주민들을 위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시설이 후지다고 타박할 수 없다. 그들에겐 자기네 집 목욕탕 같은 곳이니까.
짐을 정리하고 페니어를 다는데 리어랙 지지대 나사가 하나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여기 조이니 저기가 문제, 여기저기 성한 곳이 없구만. 다행히 어제 핸들바 백을 정리하다가 스페어 나사가 있는걸 발견했는데, 아니었음 난감했을 뻔했다. 근데 나사는 있는데 공구가 없다. 이른 시간이라 문 연 샵도 없을텐데. 미흡한 준비를 반성하며 대충 손으로 조였다. 여행을 시작하는 순간이라 다행이었다. 예전에 어디선가는 페니어의 나사가 하나 빠져서 여행을 중단하고 버스를 타고 서울에 온적이 있다. 물론 페니어가 고장나서 자전거를 그만탔다기 보단, 자전거를 그만 타고 싶어진 순간에 페니어가 망가졌다고 하는게 맞겠지만.
편의점에 들러 삼각김밥과 커피로 아침을 때웠다. 보길도로 가려면 완도항에서 약 9.5km 떨어진 화흥포항에 가서 페리를 타고 노화도 동천항에서 또 한 10km를 가야한다. 완도항에서 화흥포항까지는 생각보다 멀었다. 예상치 못했던 언덕에 놀래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이 길을 다시 돌아와야 한다니 까마득했다. 0740에 화흥포항에 도착해 0750 민국호 티켓을 끊었다.
35분쯤 지나 배가 동천항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순식간에 모두 차를 타고 사라지고 조용한 항구에 홀로 남았다. 동천항 터미널에 들러 배시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출발. 여기는 노화도, 보길대교를 건너야 보길도다. 큰비가 왔다 가더니 오늘은 날씨가 너무나 화창해 눈이 부시다. 한 폭의 그림속에서 나는 여유롭게 페달을 밟는다.
보길도
보길도는 2003년에 친구들이랑 왔었다. 밤기차를 타고 목포에 와서 유달산 일출을 봤다. 버스를 타고 해남 땅끝마을을 찍고, 갈두항에서 배를 타고 보길도로 들어와 뾰족산 근처 민박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땅끝 전망대에서 일몰을 보고, 민박집 아저씨의 멸치잡이 배를 타고 멸치 잡이 체험도 했다. 1박 2일었지만 참으로 풍성했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기본적으로 섬은 꿀렁꿀렁 오르막 내리막이 기본이다. 돌아보면 저게 내가 넘어온 길인가 싶다. 보길대교를 건넜고, 보길도에 접어든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속도계도 없고 거리도 모르니 그저 가끔 지도를 확인하면서 달린다.
파란색 또는 하얀색의 1톤 트럭들이 수도 없이 지나갔다. 울렁꿀렁한 낙타등 몇 개를 지나 땅끝 전망대에 도착. 15년 전의 땅끝 전망대와는 전혀 달랐다. 그때는 바람부는 언덕에 앉아서 일몰을 봤었는데 멋드러진 전망대가 생겼다. 데크위엔 표지석과 망원경도 있다.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시길래 안녕하세요하니 어디서 왔냐고 물으신다. 어.. 생각할 새도 없이 서울이란 말이 자동적으로 입에서 나왔다. 서울에 여까지? 아 제주요, 제주에서 왔어요.
이번 여행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어디에서 왔냐다. 해외도 아닌데 어디서 왔냐는 질문은 어디 출신이냐가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어디서 왔냐는 질문이겠지. 제주라고 대답을 하면 제주가 더 좋은데 왜 왔냐고 묻거나 (살러 온 것도 아닌데) 제주 어디에 사냐로 이어졌다. 어제밤에 제주에서 배 타고 왔다고 하니 ‘아이고 대단하네 여자 혼자~’ 혼자 다니는 여자는 이 바닥에서 대단한 걸로 통한다.
할머니가 ‘저기 저 한라산’ 하며 바다 건너를 가르켯다. 정말 한라산이 선명하게 보였다. 추자도도 보였다. 오늘 아빠 추자도 가신다고 했는데 저기 어딘가 계시겠구만 훗.
목적지는 땅끝 전망대였으나 기와 여기까지 왔으니 공룡알 해변까지 가보기로 했다. 뾰죽하게 솟은 보죽산을 돌아가니 보옥리 마을. 지난번에 여기 어디선가 묵었던 것 같은데. 자전거를 길 입구에 세워두고 해변으로 걸어가는데 풀 뜯던 염소 두 마리가 놀라서 화들짝. 이것들아 나도 놀랬다. 해변엔 아무도 없었다. 공룡알 같은 동글동글한 돌들도 그렇지만 바다 앞에 보이는 섬이 동그라니 귀여웠다.
왔던길을 돌아가는게 싫어서 나가는 길엔 차를 얻어타려고 했다. 지나가는 트럭을 세우려고 했는데 아까 그렇게 숱하게 지나간 트럭은 다 어디로 갔는지 승용차들만 쌩쌩. 트럭 5대가 지나갔고 그 중 2대에게 손을 흔들었는데 그냥 스쳐 지나갔다. 포기하고 그냥 슬슬 타고 나가기로 했다.
반쯤 왔나. 마을을 지나는데 개 한 마리가 왕왕거리며 달려왔다. 짖어대는 소리가 호기심이 아니라 성이 나서다. 놀자는게 아니라 물어 뜯겠다는거다. 순간 머리털이 섰다. 슬슬 속도를 내자 나의 쭈삣함을 느꼈는지 더 사납게 왕왕 짖으며 따라온다. 으악 안되겠다 도망가자~!! 페달을 힘껏 밟았다. 그 놈도 질새라 자전거를 들이받을 기세로 쫓아왔다. 내가 속도를 낼수록 그 자식도 열이 났는지 미친듯이 짖어대며 따라왔다. 조용한 마을의 추격전 한 판. 개에게 물릴 수 없다는 생각으로 씨게 달리다보니 어느새 왕왕거리던 소리가 멀어졌다. 휴..
개와 한 판 추격전을 벌이고 나니 배가 고파졌다. 뭐라도 먹었으면 좋겠는데 평일인데다 비수기라 그런지 먹을만한 데가 없었다. 점심은 노화도 읍내에 나가서 먹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동천석실에 들러보기로 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 내려다 본 풍경이 무척 좋았던 기억이 떠올라 다시 한 번 올라가 보고 싶었다. 동천석실 가는 길 양 옆으로 펼쳐진 산세가 예술이었다. 조용한 마을엔 새소리와 자전거 페달 소리뿐. 평화로웠다. 아. 이 맛에 섬 라이딩을 하는거야.
구석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동천석실에 올랐다. 숲길을 400여미터 지나 금방 정자에 도착. 역시나 아무도 없다. 풍경은 역시 그림이다. 기억이 가물가물 했지만 나의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또 봐도 멋지다. 동천석실은 ‘서책을 즐기며 신선처럼 소요하는 은자의 처소’라는 의미란다. 아 딱 내가 있어야 할 곳인데. 그늘에 앉아 있으려니 바람이 살살 불어와 땀을 식혀주었다. 윤선도도 오늘 같이 좋은 날 이 정자에서 뒹굴대며 책을 읽었겠지. 이 풍경을 내려다 보며 신선처럼 시도 읊고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 좋게 낮잠에 들었겠지. 아 내려가기 싫어라.
동천석실에서 내려와 노화도로 나가는 길에 편의점을 발견했다. 들어올 땐 못본 것 같은데 배고프니 보이나보다. 지금 섬을 나가는 것보다 여기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중리와 통리를 들렀다가 가기로 했다. 혼자 다니면 이런 건 좋다. 내 맘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점심 메뉴를 정하고 경로를 바꿀 수 있다.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하나 먹고 물도 2리터 짜리를 하나 샀다. 핸드폰 충전은 못하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지.
밥을 먹고 나와 우체국에서 개인 정비 후, 중리 해변쪽으로 가려고 해안쪽으로 내려가니 버스 종점인지 버스가 한대 서 있었다. 혹시나 보길도에서 노화도 동천항까지 버스를 타고 갈 수 있을까 하여, 기사님께 여쭤보니 자전거 실어주시겠단다. 아싸리 나갈 땐 버스 타고 나가야겠다.
해안으로 난 도로를 따라 달려 통리 해변에 도착. 통리 해변은 아직 비지터들을 맞을 준비가 안된 것 같았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중리 해변으로. 중리해변에 다다르자 지난번 이곳에 왔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부슬부슬 비가 왔고 우리는 바닷가를 걷다가 어디선가 차를 얻어탔었다. SUV의 뒷좌석에 넷이 쪼그려 앉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릴 땐 그렇게 히치하이킹도 쉽게 했었는데. 아주 깊히 묻혀 있던 기억이 현장에 오니 떠오르다니 신기했다.
혹시나 통리나 중리 해변이 괜찮으면 자고갈까 했는데, 보길도의 해변들은 조용했지만 야영에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계획대로 소안도로 넘어가야겠다. 갔던 길을 되돌아 나와 버스 종점에 갔는데 버스가 없다. 잠깐 기다리다 오늘 차 타는 날이 아닌갑다 싶어 그냥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했다. 서둘러 가면 4시 30분 배를 탈 수 있을 것 같아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소안도
간신히 배 시간을 맞춰 4시 30분 배를 타고 소안도로 건너왔다. 동천항에서 소안항까지는 15분. 충전 좀 하려고 했더니 너무 금방 도착했다. 터미널에서 잠시 개인 정비. 배 시간 맞춘다고 흘린 땀을 대충 씻는 동안 배는 떠나고 항구는 조용해졌다. 오늘의 숙영지인 미라 해변까지는 약 6km. 마지막에 70m 높이의 언덕이 하나 있다. 살살 달려보기로 한다. 차 없는 조용한 길을 달리려니 아 기분 좋아라~!
미라리 해변에 들어서니 날 기다리는 정자. 해변은 넓고 쾌적했다. 방범 카메라도 있고 화장실도 가깝고 식수대에 물도 콸콸 나왔다. 근처 소나무 밭에 텐트가 한 동 쳐 있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정자에 자리를 잡고 텐트를 쳤다. 데크 팩을 안 가져와서 대충 쳤다. 뭐 날아가지는 않겠지. 주변을 정리하는데 그제서야 정자에 텐트를 치지 말라는 안내문이 보였다. 아 몰라.
바닷가를 산책하고 앉아 있는데 파란 트럭 한 대가 해변으로 들어왔다. 경계심을 잔뜩 품고 관찰하고 있으려니 왠 사내가 하나 내려 두리번거리더니 내 쪽으로 다가오며 말을 던졌다.
_ 놀라셨죠?
뭐지 이 멘트는. 안녕하세요도 아니고. 누구세요 물으니 자긴 마을 관계자고 마을 순찰 중이란다.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채 몇 마디를 더 나눠보니 마을 관계자, 정확히 말하면 미라리 청장년 회장님이었다. 정자에 텐트를 쳐서 죄송하다고 깨끗하게 쓰고 아침 일찍 가겠다고 했더니 괜찮으니 편하게 쉬다 가라신다.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바닷가 벤치에 한참을 앉아서 이야길 나눴다. 멀리서 보고 남자인 줄 알았단다. ‘혼자 여행할 땐 남자처럼 보이는 게 편해요.’ 하니 고개를 끄덕거리셨다. 소안도엔 1200가구 정도가 살고 있고, 미라리엔 120 가구, 그중 47가구가 김 양식을 한단다. 보길도도 그렇고 섬에 뭔 놈의 외제차가 이렇게 많은가 싶었는데 그 이유도 알게 되었다. 마지막엔 필요한 거 있으면 전화하라고 전화번호까지 알려주고 가셨다.
좋은 마음으로 다가온 사람을 의심으로 대하는 나를 보았다. 혼자 여행을 하면서 큰 사고가 난적은 한 번도 없는데 이상하게 이번 여행은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가 섬이라 그랬을까. 여성들을 상대로 한 범죄들이 생각났다. 칼도 한 자루 챙기고 정당방위에 대해서도 알아봤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배에 함께 탔던 작업복 차림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신경 쓰였고, 모든 남자들이 거슬렸다. 시작부터 쫄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주변을 경계하고 있어서 개한테 쫓긴 거 같기도 했다. 조심하는 건 좋지만 이렇게 꼭꼭 닫은 마음, 날이 선 마음으로 하는 여행은 나만 피곤하다. 악의를 가진 사람을 구별하는 눈이 있으면 좋겠다.
해가 떨어졌다. 잘 준비를 하고 누우니 허벅지가 후끈거렸다. 간만에 많이 달려서 그런가 했더니 시뻘겋게 익어 있었다. 피부의 후끈거림과 근육의 후끈거림을 구별하지 못하다니. 참 둔하구만!
Topic: wando-bike-tour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