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에 눈을 떴다. 찜질방에서 잔 것보다 훨씬 편하게 잘 잤다. 정리를 하고 5시 40분 출발. 미라리에서 진산리로 바로 가지 않고 아래쪽까지 섬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가기로 했다. 호기롭게 출발했지만, 얼마 못가 엄청난 경사가 나타나 내려서 자전거를 끌어야 했다. 가로질러 갈 것을 그랬나 후회를 하고 돌아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언제 또 이 섬에 와서 라이딩을 하겠냐 하는 마음에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덕분에 몇 개의 언덕을 더 오르락내리락해야 했지만 그래도 섬의 구석구석을 탐방하는 건 재미있었다. 탁 트인 전망대에서 짜짜로니도 하나 끓여먹었다.
무슨 드라마 촬영지도 잠시 들렀다. 절벽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잔잔했고 아침 공기는 투명했다. 맹선리에서 소안항까지 연결된 평지길은 완전 평화로운 길. 이번 여행 중에 가장 좋았던 길이다. 물론 이 길은 그 언덕을 넘지 않았어도 지나가게 되는 길이지만, 낙타등 뒤의 평지길은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소안도는 나에게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으로 기억될 것 같다.
다시 완도로
아침 일찍 일어나 시작한 덕에 한참 자전거를 탄 것 같은데 아직 9시도 안됐다. 소안도에서 9시 배를 타고 10시에 화흥포항에 도착했다. 다시 완도항으로 10km를 가야한다. 까마득했다. 배에서 내려 버스가 세워져 있길래 다가갔다.
_ 기사님 어디 가는 버스에요?
_ 완도 버스 터미널 갑니다.
_ 혹시 자전거 실을 수 있나요?
_ 자전거는..
_ 짐칸에 실으면 되요!
_ 잘 실어 보쇼잉~
자전거를 버스에 실으려는 라이더들과 그를 거부하는 버스 기사들과의 충돌은 꽤 잦은 일이다. 버스가 자전거를 실어줄 의무는 없다. 실어줄 의무가 없는데 실어 준다고 하면 고마운거다. 아싸라비야 하며 달려가니 기사님이 내려와서 짐칸 문을 열어주셨다. 한 시간이 걸릴 거릴 차타고 쓩 10분도 안걸렸다.
요금은 5백원. 내릴 때 잔돈이 없어 염치 없이 1만원짜리를 내미니 돈 받던 기사님 ‘에잇!’ 하고 옆으로 밀어내며 면박을 준다. 옆에 계시던 할머님들 깔깔대며 웃으며 그냥 가라고 거드셨다. 얼른 짐칸에서 자전거를 내리며 ‘아이고 우짜 쓰까잉’ 하며 능청을 떨어대니 기사님 허허 웃으시며 ‘아따 가시내, 참말로 귀찮게 하네!’ 라며 동전까지 다 털어 잔돈을 건내주셨다.
미안하기도 했지만, 내가 먼저 다가가 부탁했을 때 난 상대방의 호의와 웃음을 보았다. 500원이 없다고 정색하고 거둬들일 호의가 아니었다. 그 덕에 안전하고 편하게 왔다. 큰 소리로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니 조심하라고 손을 흔들어 주셨다.
버스터미널에서 자전거를 타고 완도항으로 가는길, 뭐지 이 든든한 기분은. 시골에 살다 시내에 나온 기분이랄까. 괜시리 기분이 좋았다. 자전거 샵에 들러 벼르고 벼르던 스페어 튜브도 하나 샀다. 자전거샵만 반가운게 아니라 커피샵도 반갑고 편의점도 반가운 걸 보니 나는 어쩔수 없는 도시인이다.
청산도
완도항 여객터미널에 가서 1130에 청산도로 가는 티켓을 끊고 개인 정비. 가장 먼저 핸드폰을 충전해야 했다. 자전거 여행중에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은 바로 핸드폰이다. 사진도 찍어야 하고 검색도 해야하고 연락도 해야하고 지도도 봐야하니 핸드폰 배터리 관리는 자전거 여행에선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것저것 하다보니 금방 시간이 흘렀다.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새가 없어 터미널 편의점에서 김밥을 두 개 샀다. 편의점 없으면 어떻게 여행했을까 싶다. 고마운 편의점.
청산도 가는 배는 정확히 1130에 출발했다. 엄청 좋은배다. 매점도 있길래 시원한 아이스 커피도 한 잔 마셨다. 쾌적한 객실에 누워서 배터리 걱정 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아 좋아라. 청산도를 어떻게 둘러볼지 계획도 세웠다. 어제 보길도에서 짐을 매달고 왔다갔다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돌아나올 길이었는데 어딘가에 맡겨놓고 움직일 생각을 못했다. 오늘은 숙영지를 미리 정하고 짐을 내려놓고 움직이기로 했다. 오늘 숙영지는 항구와 가장 가까운 지리 솔밭으로 정했다.
청산도항에 내리니 한 번 와봤다고 익숙하네. 지리해변은 항구에서 약 2km. 약간의 오르막이지만 완만하니 할만하다. 표지판을 따라 해변으로 접어드니 해변은 폐쇄. 물도 안나오고 화장실도 엉망이다. 딱 여기다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 샤워할 생각은 원래 없었고, 마실 물은 충분했고, 화장실은 everywhere. 적당히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소나무 사이로 바다가 보이게 텐트를 치고 자전거를 끌고 나섰다.
지난번엔 청산도에 당일로 와서 하루종일 걸었는데 남쪽에 난 길 위주로 걸었다. 이번엔 지난번에 걷지 못한 북쪽 길 위주로 코스를 잡았다. 걸음은 느리지만 자전거는 빠르다. 게다가 오늘은 짐이 없으니 가볍다. 날아갈 것 같다. 해가 높은 시간이었지만 길 옆에 나무가 우거져 그늘이 생겼다. 녹색 나무 터널길을 따라 달리니 오르막일지언정 즐겁다.
북쪽 슬로길은 거의 포장도로. 걷기엔 별로이나 자전거 타기엔 더 없이 좋은 길이다. 진산리를 지나 신흥리 해변까지 북쪽으로 반 바퀴를 돌았다. 언덕의 코너를 돌자 엄청 넓은 해변이 나타났다. 와우! 한국에도 이런 곳이 있다니. 저 멀리 해변엔 단체 관광 버스가 두 대나 서 있었다. 커피를 파는 푸드트럭도 한 대 보였다. 신흥리 해변은 지난번 여행에서 왔던 곳인데, 모든 장면이 오늘 처음보는 것 같았다. 보는 시선에 따라 이렇게 느낌이 다를 수도 있구나. 나무그늘에 앉아 김밥을 하나 까먹고 한참을 쉬었다.
다시 청산도항으로 돌아왔다. 손수건도 빨고 흘린 땀도 좀 씻어내고 싶은데 비누가 없다. 대충 손수건을 물에 적셔 먼지만 털어냈다. 그래도 이렇게 물칠이라도 하고 나면 한결 상쾌하다. 오늘 저녁은 맥주다. 뽀송뽀송한 기분으로 편의점에 가서 맥주를 한 캔 샀다. 시원할 때 마시고 싶어 바로 맥주를 따 한 모금 들이켰다. 크아. 이 맛이지.
보길도에도 소안도에도 청산도에도, 편의점이 있다. 편의점이 있다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뻥이요와 왕소라를 전국 어디서나 먹을 수 있고,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 김밥이나 도시락을 먹을 수 있다는 얘기다. 아이스 커피를 1200원에, 맥주 4개를 1만원에 살 수 있다는 소리이다. 여행을 안전하고 편리하게 만들어 주는 편의점에게 감사하며. 건배.
알딸딸 좋은 기분으로 지리 솔밭 해변으로 돌아왔다. 해가 참 길다. 7시30분까지 해가 떨어지길 기다린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잔잔한 바다 물에 물둘레가 생기길래 가만히 지켜봤더니 망둥언지 뚱장언지가 물고기들이 뻐끔거리다가 물 밖으로 팔딱 팔딱 뛰어올랐다. 고녀석들 참. 한참을 앉아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구경했다. 월든 호숫가의 풍경이 이랬을까.
드디어 소나무 사이로 해가 떨어졌다. 8시. 안녕 물고기들아 난 잔다.
Topic: wando-bike-tour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