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 타워 아래 앉아 있는데 11시가 되자 갑자기 불이 꺼졌다. 형형색색으로 불을 밝히던 완도 타워도, 공원의 가로등도 다 꺼졌다. 사방이 깜깜해졌다. 설마 문을 닫은 건 아니겠지. 벤치에 앉아서 여행을 정리하고 있던 나는 핸드폰으로 불을 밝히고 서둘러 내려왔다. 다행히 문 같은 건 없었다.
완도항 터미널로 돌아와서 일찌감치 자전거를 싣기로 했다. 배의 앞쪽으로 가니 작업중인 아저씨가 직접 마중을(?) 나왔다.
_ 처음이세요?
_ 아니요. 돌아가는 길이에요.
_ 그럼 아시죠? 귀중품은 빼시고, 뒤쪽에 넣어둘테니 이따 꺼내가세요.
_ 네, 잘 부탁드립니다!
자전거를 넘기고 나니 몸이 자유로워졌지만, 대형 트럭들 사이를 걸어 터미널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내가 개미처럼 작고 느리게 느껴졌다. 자전거가 나에겐 날개였구나.
제주로 돌아가는 배 시간 0230. 제주엔 5시, 해 뜰무렵 도착한다. 완도 여객선 터미널은 쾌적했다. 공항처럼 쾌적했다. 덕분에 기다리는 시간이 매우 편안했다. 긴 의자에 누워 여행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0200 보딩 시작. 배에 올라 객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얼른 TV 전원을 꺼버렸다. 이 늦은 시간 TV소리는 소음 공해다. 누워서 눈을 감고 있으려니 누군가 객실 불도 껐다. 덕분에 2시간 30여분 동안 아주 꿀맛같은 단잠을 잤다.
제주에 내리니 출발할 때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얼른 우비를 챙겨입고 쓰레빠로 갈아신고 출발. 집으로 돌아가는 즐거운 페달링. 비가 그치고 젖은 우비도 다 말랐다. 조천부터 해안도로를 따라 달렸다. 제주도 섬이지만 울렁꿀렁 낙타등이 없다. 자전거 타기 참 좋다. 룰루랄라 하는 사이 집에 다 왔다. 하이 뷰티풀 함덕!
여행을 정리하며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만 늘어놓고 보면 정말 멋지다. 이런 힐링이 또 없다. 하지만 여행에 아름다운 순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자전거 여행은 더 그렇다. 땀과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비를 맞기도 하고, 개에 쫓길 때도 있다. 위험하고 불편하고 더럽고 피곤하다.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잊을만큼 멋진 풍경이 있고 짜릿한 순간들이 있고 좋은 사람들이 있다. 난 그게 더 중요하다. 그러니 그 개고생을 하면서 계속 하는 거겠지.
혼자 자전거 여행을 하려면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자전거에 대한 기본 지식은 물론, 펑크나 체인 빠짐 같은 간단한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줄 알아야 한다. 지도를 볼 줄 알아야 하고, 방향 감각과 거리 감각이 필요하며, 자전거를 내 몸처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아야 하고, 차와 나란히 달리는 것이 두렵지 않아야 한다. 나에게 맞는 속도를 찾아야 하고, 필요 없는 경쟁은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오르막에서 힘이 들면 자전거를 끌 수도 있고, 버스에 태워 이동할 수도 있는 유연함이 있어야 한다. 멋진 풍경에 갑자기 기분이 업되어 신나게 달렸으면 그 멋진 풍경에 잠시 자전거를 세우고 쉬어갈 줄 알아야 한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자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야 하고, 잠자리나 씻는것 등엔 둔해야 하지만, 자기 주변을 돌보고 몸 상태를 체크하는 데는 예민해야 한다. 지나가던 차가 이유없이 빵빵대도 쫄지 않고 뒤에서 손가락을 하나 들어줄 수 있는 뻔뻔함, 미친 개가 쫓아 올 때 개보다 더 빨리 도망갈 수 있는 폭발적인 힘도 필요하다. 타인에 대한 적당한 관심이 있어야 하고, 혼자 놀 줄도 알아야 한다. 부탁해야 할 상황에 웃으며 부탁하고 거절을 두려워 하지 않아야 하며, 누군가의 호의를 감사하게 받을 줄도, 때론 정중히 거절할 줄도 알아야 한다. 누군가는 왜 그 고생을 사서 하는지 이해가 안간다고 하지만, 이 많은 것들을 직접 경험하고 배웠으니 그간 한 ‘사서 고생’은 결코 헛되지 않다.
이번 여행을 하며 여러차례 나에게 물었다. 지금도 자전거 세계여행을 하고 싶은지, 혼자 몇 달씩 이렇게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다른 나라들을 여행하고 싶은지 물었다. 나의 대답은. Yes 도 No 도 아닌, Why? 왜 자전거이고, 왜 몇 달이고, 왜 다른 나라지?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땐, 부러웠었다. 답답한 오피스 창 너머로 자전거를 타고 유유히 달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도 저렇게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작은 생각이 나를 지금 여기에 있게 만들었지만, 돌아보면 내가 그 당시 원했던 것은 ‘자전거 세계여행’이 아니라, 원할 때 ‘자전거’를 타고, 원할 때 ‘여행’을 할 수 있는 ‘자유’였다.
물론 아직 부족하지만 내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 자전거와 함께 여행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를 가졌음은 분명하다. 그럴만한 충분한 상황이 됨에도 불구하고, 실행으로 옮기지 않는다는 것은 내 마음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건, 간절히 원하지 않아서다.
이번 여행은 원하는 곳에 가서 원하는 만큼 자전거를 탔다. 가고 싶은 곳에 가서 달렸고, 가고싶지 않은 길은 돌아왔으며, 쉬고싶은 순간에는 페달을 밟지 않았다. 먹고 싶은 것은 먹었고, 먹고싶지 않은 것은 먹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억지로 한 일도 아니다.
충분히 좋았다. 오래전 추억을 떠올리며 한적한 해안길을 달린 것도, 조용한 바닷가에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잔 것도 모두 내가 원했던 거다. 바다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던 순간도, 아침 공기를 마시며 유유히 페달을 밟던 순간도,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시원한 바람을 맞던 순간도, 낯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순간들도, 야경을 바라보던 쓸쓸했던 순간도, 모두 소중했던 순간이다. 충분했다.
또 때가 되면 슬그머니 올라올 것이다. 이 모든 순간들이 그리워지는 순간, 다시 인터넷을 뒤지고, 자전거를 닦고 기름칠을 하게 되는 날은 머지않아 다시 올 것이다. 다시 떠나고 싶어질 때, 그때 떠나면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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