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물도에서 1박 거제에서 1박 총 2박을 예상하고 오랜만에 바리바리 박배낭을 메고 나섰습니다. 집 떠난지 5시간만에 저구항 선착장에 도착하여 표를 끊으려 하는데 내일 나오는 배가 없다는 청천벽력같은 소리.
잠시 고민하다 매물도는 다음을 기약하고 오늘은 원래 내일 하려고 했던 산행에 나섭니다. 이때 시간이 13시. 일단 저구항 옆의 명사 해변까지 걸어가 봅니다. 날씨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음. 땡볕에 벌써 지칩니다.
바람 한 점 없습니다.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합니다. 땡볕에 앉아 있을 곳도 없고 차라리 숲에 가면 시원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바로 계단 오르막이 시작됩니다. 얼마 못가서 헥헥. 등에 있는 배낭이 뒤로 끌어당기는 것 같습니다. 하악하악. 내가 학 그래도 학 왕년에 학 박배낭 메고 학학 7박 산행도 학학 했었는데 학학 이까짓 학 300 자락 학학학 쯤이야 학학학학 . . .
평소 산행에선 거의 쉬지 않고 걷는 편인데 오늘은 몇 걸음 못가 숨을 고릅니다.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르니 힘든거고 힘이 드니 땀이 나는 건 알겠는데 왜 자꾸 어지럽지?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간만에 예를 갖춘다고 챙겨입은 브라 때문인가? 면으로 된 새로산 모자 때문인가? 통풍이 안 되는 새로 산 등산화 때문인가?
되돌아 보니 잘못된 것은 폭염경보가 뜬 날씨였고, 암 생각 없이 싼 무거운 배낭이었고, 이정도 쯤이야 생각했던 교만함 이었습니다.
45분 걸린다는 이정표와는 달리, 학학거리며 1시간 20분만에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경치는 좋은데 너무나 덥고 힘이듭니다. 앉아 있고 싶은데 그늘 한 점 없습니다. 괴로워하며 숨을 고릅니다.
이제 하산길. 말이 하산길이지 망산 정상에서 저구삼거리까지 몇 개의 봉우리를 더 지납니다. 오르락내리락이 반복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때마다 온몸의 땀구멍에서 땀이 솓아나는 것 같습니다. 턱에서 가슴골에서 땀이 뚝뚝 떨어집니다. 땀인지 습기인지 무르팍도 축축합니다. 불타는 몸을 식혀줄 바람 한점 없습니다. 거미줄은 또 왜케 많은지 몇 걸음마다 얼굴을 감쌉니다. 이쯤 되면 입에서 욕이 나와야 하는데 짜증낼 기력도 없습니다.
내가 산에서 이렇게 힘들었던 적이 있었던가? 발가락이 아파서 고통스러웠던 적은 있어도 기력이 딸려 힘들었던 기억은 없습니다. 십자가를 메고 언덕을 오른 예수님의 발걸음이 이랬을까? 이제 좀 덜 힘든 취미생활을 찾아야하나?
중간에 하산할 수 있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어차피 내려가도 차 시간이 맞지 않아 울며 겨자먹기로 그냥 저구 삼거리까지 걷기로 합니다. 중간에 전망 좋은 데크가 하나 있었고 두 세 군데 정도 텐트를 칠만한 평평한 공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필코 하산하기로 합니다.
출발한지 5시간만에 만신창이가 되어 하산합니다. 버스시간까지 근 2시간이 남았길래 다시 저구항으로 이동합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세상 미련한 짓을 했습니다. 빈손으로 걸었어도 될 길을 미련하게 박배낭을 메고 걸은 꼴이 되었으니까요. 배가 없을 줄 알았다면.. 버스 때문에 다시 저구항으로 돌아올 줄 알았다면.. 이렇게 힘들 줄 알았다면..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남은 시간 해변에서 일몰을 보기로 합니다. 반성하며 터덜터덜 명사해변으로 향합니다. 해가 지고 나니 신기하게도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발가락 사이에 바람좀 넣어주고 싶은데 신발 벗을 힘도 없습니다. 혹시나 아름다운 풍경에 기운이 솟아나 텐트를 칠 힘이 생길까 싶어 가만히 앉아있어봅니다.
바리바리 싸온 배낭이 아까워서라도 왠만하면 해변에서 1박을 할 법도 했지만 살면서 이토록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모기한테 언제 이렇게 뜯긴건지 온몸이 근질근질. 팔다리는 뭐라도 붙일 수 있을만큼 끈쩍끈적. 이 몸을 어서 빨리 집에 데려가 씻기고 눕혀주고 싶다는 생각뿐입니다. 이것이 동물의 회귀본능인가 봅니다.
다시는 생각없이 싼 배낭을 메고 여름 땡볕에 산을 걷는 일은 없기로, 이제부터 백패킹은 반드시 봄 가을에 하기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다짐합니다.
2박3일로 예정했던 일정을 당일로 마무리 하고 수구소침을 행하듯 기어이 집에 돌아와 몸을 씻기고 눕혀줍니다.
TIL
- 배편 이용시에는 늘 전화로 다시 확인을 한다. 특히나 태풍 시즌에는.
- 배낭은 꼭 무게를 재면서 짐을 싼다.
- 혹서기에는 계곡이 아닌 이상 절대 산행을 하지 않는다. 특히 박배낭을 메고.
- 시골 시내 버스는 매우 난폭하다. 하지만 대부분 제 시간에 온다.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온 산행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