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왔다. 마이삭이란 놈이었다. 지난번 태풍 바비때 요란하게 군 것에 비해 싱겁게 지나가길래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는데 된통 당했다. 나름 스펙터클했던 일이라 적어두기로 한다.
초저녁에 나가보니 바람이 많이 불길래 창문을 온 집안의 창문은 꽁꽁 닫았다. 맥주를 한 잔 마시고 비오는 야경을 감상하다 잠이 들었다. ‘비 엄청나게 오네’ 생각하며 잠이 들었는데 얼마나 지난걸까 어디선가 들리는 꼴꼴꼴 물 소리.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 불을 켰다. 소리의 근원지는 창문. 창틀에 물이 반쯤 차올라 찰랑거리고 있었다. 가만 들여다보니 물구멍으로 물과 바람이 안쪽으로 계속 밀려들며, 바람이 휘~ 소릴 내면 창틀에 고인 물이 꼴꼴꼴 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처음보는 신기한 현상에 잠시 넋 놓고 구경을 하다 물의 수위가 높아지는 것을 보고 아차차 그제서야 허둥지둥 창틀 물마개를 찾기 시작했다. 창틀 물구멍에 마개를 끼우라고 몇 번 방송이 나왔는데 대수롭지 않게 여겨 그냥 냅뒀었다. 다 이유가 있었구만 생각하며 이미 물이 꽉 찬 창틀 구멍을 대충 막았다. 이런 걸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하는구나. 이땐 몰랐다 나에게 어떤 시련이 들이닥칠지.
뒤늦은 물마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이미 물은 창틀을 너머로 밀려들고 있었다. 다른 곳을 살펴보니 다행히 거실과 다른 방 하나는 괜찮았다. 왜 이 방만 이러지? (왜냐고? 니가 구경한다고 안쪽 창문을 열어놨기 때문이지) 걸레를 가져다 물을 닦아봤지만 손바닥만한 걸레로는 물의 양을 감당할 수 없었다. 바람이 거세지자 창틈 사이로 바람이 삐집고 들어와 휘파람같은 소리를 내니 창틀에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안되겠다 싶어 안쪽 창문을 닫았다. 걸레를 들고 화장실을 오가다가 안 되겠어 냄비까지 동원. 몇 번 냄비를 비워내며 물을 받아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물이 넘쳐나 바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방어벽이 무너지는 순간. 아 cbar.. 졌네.
상황이 심해진 것 같아 다른 방에 가보니 오마이 갓. 옆 방도 거실도 모두 물이 차올라 찰랑 거리고 있었다. 넘쳐나는 건 시간 문제. 다행히 안방은 베란다가 있어 괜찮았다. 몸뚱이는 하난데 돌봐야할 방은 세 개. 오 주여!
일단 집안을 뒤져 수건을 다 동원해 창틀에 대충 올려두고 관리소에 전화를 걸었다. 늦은 시간에 다행히 전화를 받네. 창틀 너머로 물이 샌다 우리집만 그런거냐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 다다다 쏟아놓으니 다른 집도 다 그런 상황이고 하자라기보단 비가 많이 와서 그런거고 관리소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일단 잘 막아보란다. 그래 이시간에 뭘 어쩌자고 전화했을까. 별 성과는 없었지만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위로를 받고 전화를 끊었다. 아래위집도 분명히 같은 상황이겠구나. 내 머리위에서 머리 아래서 누군가가 나처럼 허둥거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시간은 두 시를 넘기고 있었다.
전쟁 시작이다. 온집안을 뒤져 수건을 총동원 해 창틀을 막고 이 방 저방을 뛰어 다니며 창틀에서 물을 퍼냈다. 창 틈에선 계속 물이 새 들어왔다. 코딱지만한 냄비는 수건을 두어번 짜면 금방 차올랐다. 걸레 짜고 물 버리고를 수십번 왕복. 몸이 세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나중엔 압력밥솥, 후라이팬은 물론 된장찌개를 끓여놨던 냄비까지 싹다 동원했다. 하지만 동선은 하나도 줄어들지 않았다. 결국 다 내가 버려야할 물이었다. 내가 걸레를 짜면 누군가 냄비를 비워줘야되는데 이 밤 나는 혼자다.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걸레짜고 물 비우고. 수비를 위한 리소스가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거실의 넓은 창틀을 막기위해 이불을 동원했다. 이불을 창틀에 올려놓고 방에 들어가 보니 바닥에 물이 흥건. 1번 방바닥에서 물을 닦아 내고 2번 방에 가보니 물이 철철 넘쳐 났다. 2번 방에서 걸레를 몇번 짜내고 거실로 가보니 창틀에서 거실로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물에 젖은 이불은 무거워서 옮기기도 힘들고 짜기는 더 어려웠다. 젖은 이불 짜는 일은 포기하고 바닥에 덮어두었다. 창틀에 꼴꼴 거리던 건 차라리 평화로웠다. 아 그리운 아까여..
결과적으로 모든 방에서 방어에 실패했다. 잠깐 허리를 폈다. 베란다 창문에 비친 내 꼴을 보니 기가차서 웃음밖에 안 나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차라리 에라 모르겠다, 마음이 편해졌다. 토사물도 아니고 바닥에서 물기 좀 닦아내는 게 뭐 대수라고. 물 한 통 쏟았다고 생각하니 여유가 생겼다. 젖을 물건도 없고 다칠 사람도 없고 그저 바닥만 닦아내면 되니 그리 큰 일도 아니었다.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집에 물 조금 새는 걸로 이렇게 안절부절인데 가진게 많은 사람 잃을 게 많을 사람은 걱정도 많겠다 싶었다. 가진게 없어서 참 다행인 순간.
자 정신 차리고 다시. 대충 올려놨던 수건은 물론 굴러다니던 양말 손수건 등 천이란 천은 다 끌어다가 창틀 레일과 창문의 틈을 막기 시작했다. 숟가락을 하나 들고 방마다 다니며 아주 구석구석 꼼꼼히 쑤셔넣었다. 나중엔 모자라 옷까지 북북 찢었다. 그렇게 새로이 방어벽을 구축하고 화장실과 싱크대를 열심히 오가며 물을 퍼냈다. 오가다 흘린 물로 온집안이 엉망진창이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래 운동한다고 치자.
무념무상으로 걸레를 짜고 있으려니 어느새 바닥의 물기가 다 사라졌다. 창틀에서도 더이상 물이 넘치지 않았다. 창틀 막기 작전이 통한 건지 태풍이 지나가서인지 알 수 없지만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창문을 거세게 후려치던 비가 잦아든 것 같았다. 할렐루야. 전쟁이 끝났다. 다행이다 살았다. 웅크리고 앉아있던 허리를 폈다. 어찌나 걸렐 짜댔던지 손목이 시큰하고 손이 퉁퉁 불었다. 휴. 내일은 늦잠좀 자겠구만.
그렇게 밤이 지나고 다음날 아침 느즈막히 눈을 떠 보니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하늘이 쨍했다. 밤새 그리 개고생을 시키더니 이런 날씨를 놓고 갔구만. 그래서 난 그 틈을 타 벼르던 산행을 다녀왔다.
오늘 또다니 태풍 소식이 들려온다. 스쳐지나갈것같다고 하지만 저녁이 되니 바람 소리가 심상찮다. 설마 그런 일이 또 일어날까? 아닐거야. 문을 꽁꽁 쳐닫고 오늘 잠은 안방에서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