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에 있는 황학산 백화산. 아빤 왜 자꾸 이런 듣보잡 산엘 가자고 하는 걸까. 별로 가고 싶은 산은 아니었지만 주말도 아니고 산악회 버스도 아니고 예전에 해둔 말도 있어서 따라나섰다.
6시 출발. 해가 뜨기 훨씬 전인 겨울의 이른 아침. 이 시간에 일어나 본 게 언제야. 산악회 버스를 타려면 첫차 타고 나가야 하는데 오늘은 아빠가 집 앞으로 태우러 왔다. 편하구마이.
서울서 문경까지 2시간 남짓. 휴게소도 문을 안 열어서 밥은 문경에 도착해서 먹었다. 영업을 하는 집이 없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이 간 곳이었지만 괜찮았다.
밥을 배불리 먹고 산행 종점인 마원성지로 이동. 종점에 차를 세워두고 기점인 이화령으로 택시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산행 경로가 원웨이라면 기점에 차를 두던 종점에 차를 두던, 어차피 한 번은 택시의 힘을 빌려야 한다. 종점 기점 각각 장단점이 있지만 나는 하산해서 이동하는 수고 없이 거기서 바로 정리하는 게 좋더라고.
아빠가 능숙하게 카카오택시로 택시를 호출했다. 이화령까지 택시비도 아빠가 냈다. ㅋ
아빠의 요즘 최대 관심사는 나이인 것 같다. 아빠보다 나이 많아 보이는 손님들이 자꾸 어르신 어르신 한다며. 얼마 전 산에서도 자기랑 비슷해 보인다며 처음 보는 사람한테 다짜고짜 몇학년 몇 반이냐고 묻더니, 오늘은 기사님한테 연세가 어떻게 되시냐고.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의 나이가 왜 궁금한 것인가가 나는 궁금하다.
아래에 있을 땐 몰랐는데 이화령은 바람이 차가웠다. 괴산 쪽 풍경을 한 번 감상하고 개인 정비 후 바로 출발.
들머리가 잘 보이지 않아서 긴가민가 하고 계단을 올랐는데 올라가서도 군시설인지 뭔지로 길이 막혀 있었다. 인터넷에서 이미 보고 알았던 내용이긴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분명 백화산 표시를 보고 계단을 올라왔건만 계단 끝은 철조망으로 막혀 있었고 아무런 우회 표시가 없었다.
옆으로 길이 나 있긴 했지만 한 뼘이나 될까, 발 잘못 디디면 골로 갈 것 같아 덜덜 떨면서 걸었다. 히말라야 가서 눈 쌓인 절벽길 걷던 기분.
나는 뒤에서 투덜거리고 아빠가 앞장을 섰다. 군시설인지 뭔지를 지나 제대로 된 등산로로 접어들어들어 한숨 돌렸다.
얼마 못 가 갑자기 나타난 절벽. 낭떠러지 길도 모자라 절벽이라니. 절벽엔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있긴 하지만 밧줄이 없어 위험천만. 이거 길 맞나? 의심하고 있는데 아빠는 이미 내려가고 있었다. 나도 간신히 내려가서 보니 옆으로 우회 길이 있더라는. 산에서 앞만 보고 가면 이런 일이 생긴다.
조봉 지나 황학산 정상에 도착했다. 그냥 뒷산 수준이다. 이후 백화산까지 큰 경사 없이 거의 쭉 능선 길이다. 밧줄 잡고 오가는 암벽 구간이 몇 군데 있었다.
백화산 정상쯤 다다르자 눈이 얼어 있어서 아이젠을 착용했다. 아, 오늘 등산화는 아빠가 새로 산 등산화를 빌려서 신어봤는데 다이얼을 돌려서 조이는 방식이 익숙지 않았지만 착용감은 나쁘지 않았다. 좀 커서 양말을 두 개 신어야 했지만.
날씨 나름 맑음이었는데 먼진지 구름인지 뭔지 시야가 깨끗하지 않았다.
세 시간 만에 백화산 정상 도착. 별로 힘들지 않아선지 별 감흥이 없었다.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정상 두 개를 찍었으니 간식을 먹고 가기로. 바람을 피해 자리를 잡고 계란 두 개와 두유, 새우탕까지 뚝딱해치웠다.
개고생 하산길. 차를 세워둔 마원성지로 가야 해서 원래 봐두었던 지점에서 마원리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방향 표지는 있는데 등산로가 전혀 없는 상태. 낙엽으로 뒤덮인 산을 그냥 미끄러져 내려가는데 아무런 표시도 없고 그나마 따라 내려오던 리본도 중간에 사라져버렸다.
길을 찾다가 포기하고 그냥 계곡을 따라가기로 했다. 낙엽길은 그나마 걷기 편했는데 이끼 낀 돌과 낙엽이 섞여 있으니 미끄럽고 위험했다. 갑자기 오른쪽 발이 바위틈에 빠지며 허벅지까지 쑥 빨려 들어갔다. 낙엽으로 덮인 바위틈이었다. 처음엔 그래도 재밌었는데 부상을 당하고 나니 점점 재미가 없어졌다. 왜 이렇 거지 같은 길을 등산로라고 써놓은 건지 이해가 안 갔다. 괴산의 명산은 얼어 죽을.
골짜기를 따라 한 3km를 내려왔다. 어디쯤에서부턴지 다시 리본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안전하게 산행을 마쳤지만 다시는 이런 잡산에는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산에 가는 이유는 힐링과 풍경이다. 숲속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고 높은 곳에 올라 멋진 풍경을 보기 위해 산에 간다. 운동과 인증샷이 목적인 아빠랑은 다르다. 더 온전한 자연을 느끼기 위해 배낭을 메고 깊은 숲으로 들어가는 것은 좋지만 무리해서 속도를 내며 하루에 여러 개의 산을 오르내리는 건 싫다. 물론 정상에 오르는 건 좋지만, 정상석에서 찍은 인증샷보다 거기서 바라보는 멋진 풍경이 더 좋다. 나는 숲을 느끼며 천천히 걷고 느끼는 산행을 하고 싶다.
아빠는 안 가본 산을 가보고 싶어 하지만 그런 산은 사람도 없고 등산로도 관리가 잘 안된다. 길 잃기 십상이다. 아빠가 그래서 나를 끌고 가려는 거다. 잡산중에도 물론 멋진 산이 많지만, 그래도 명산이 명산인 건 분명히 이유가 있다. 풍경이 멋지고 관리가 잘 된다. 길이 널찍하고 표지판도 잘 되어 있어 길을 잃을 일도 없다.
안 가본 산에 가는 것도 좋지만, 같은 산도 계절에 따라 다르고 날씨와 시간에 따라 다르다. 내 몸 상태에 따라 다르고 기분에 따라 다르다. 산은 하루도 같은 날이 없다. 나는 몇 시간씩 길에 기름 뿌리면서 지방에 있는 이런 잡산에 가서 인증샷 찍는 것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 명산을 여러 번 오르는 게 더 좋다.
난 전투적으로 산에 다니고 싶지 않다. 남의 전투에 동원되고 싶지도 않다. 그동안은 아빠가 가자는 산을 갔지만 앞으로는 내가 원하는 산을 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