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mply Me
제주에서 만든 눈사람
12 Jan 2021
6 minutes read

제주에서 지낸 2주 동안 눈이 많이 왔다. 우리가 지낸 숙소 마당에도 눈이 한동안 쌓여있었다. 그동안 살면서 눈이 가끔 와서 몰랐는데, 이번에 보니 나에겐 눈만 보면 뭉치거나 굴리는 습성이 있더라. 어릴때 눈에서 맘껏 못 놀았는가 싶다. 우리가 만든 눈사람 얘기를 써보기로 한다.

No. 1

이녀석은 나 혼자 만들었다. 자고로 눈 사람은 두 명이 각자 눈덩이를 굴려 합체해서 만들어야 마땅하나, 마침 혼자 나갔다가 집에 들어가는 길이라 협업할 친구가 없었다. 게다가 잘 안 뭉쳐지는 눈이라 아담한 사이즈로 만들었다. 거실 창문으로 깜짝 등장해 솔이에게 인사.

솔아 안녕?
솔아 안녕?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표정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표정
솔이랑 한 컷
솔이랑 한 컷
눈에 파묻혀 버렸다
눈에 파묻혀 버렸다

바람을 피한다고 화단 옆에 놨는데 나중에 보니 햇빛이 아주 잘 드는 곳이었다. ㅋ 다음날 눈 속에 묻혀졌다가 그 이후 해가 날 때마다 조금씩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

No. 2

이 녀석은 눈이 아주 많이 온 날 바닷가에 나가서 다같이 만들었다. 산책 나갔다가 넓은 공터에 눈 밟으러 들어갔는데 어느새 눈 굴리고 있는 나. ㅋㅋ

여기서 눈 안 굴리고 뭐하겠음?
여기서 눈 안 굴리고 뭐하겠음?

솔이랑 솔이애비가 한 덩이, 내가 한 덩이 굴렸다. 눈이 엄청 잘 뭉쳐져서 비교적 쉽게 만들었다. 눈이 잘 붙길래 대충 굴렸더니 덩어리도 못생기게 굴려졌다. 주변에서 구한 돌맹이와 귤껍질로 눈과 코를 붙여주고 못생긴 얼굴에 벼슬(?)도 달아줬다.

마무리 성형 중
마무리 성형 중

새하얀 눈으로 뚝딱 만든 눈사람. 다시 볼수나 있을지도 모를 눈사람에게 솔이가 ‘로리’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로리.. 다시 불러볼 수 있을까?

로리와 아쉬운 작별 인사
로리와 아쉬운 작별 인사

정성들여 만든 눈사람이 망가진 모습을 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그래서 다시 가보진 않았지만 이틀 뒤 지나가다 얼핏보니 녹아선지 바닷가에서 바람을 맞아선지 모르겠지만 부서져 있었다. 로리 홀로 바닷가에서 외로웠겠다. 안녕.

No. 3

세번째 눈사람은 뒷마당에서 모두가 힘을 다해 만든 거대 토토로 되시겠다. 2년전 겨울 오버트라운에서도 커다란 토토로를 만들고 싶어서 깨작거리다 말았는데 이번엔 드디어 완성!(나 자꾸 토로로라고 해서 솔이한테 쿠사리 엄청 먹음 ㅋ)

바닷가에 산책을 나갔다 와서 바닷가에 두고 온 눈사람이 아쉬워서 하나 더 만들기로 했다. 바닷가만큼은 아니지만 마당에 눈이 많이 쌓여 있었거든. 일단 크게 만드는 게 관건이라 마당 한 구석에 있던 나무 의자에 눈을 붙여나갔다. 눈이 잘 뭉쳐져서 눈썰매로 푹푹 퍼서 붙이면 척척!

눈보라 속의 노동
눈보라 속의 노동

처음에는 솔이랑 둘이 했는데 우리가 하는 게 재밌어 보였는지 나중에는 제부랑 막둥이까지 나왔다. 덩어리가 커지니 뭔가 될 것 같았나? ㅋ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두 내외가 눈사람을 거들러 나왔다. 제부에게 눈썰매를 넘겼다.

바통 터치
바통 터치

모두가 힘을 합치니 금방 솔이 키만큼 눈이 쌓였다. 막둥이가 신중하게 귀를 만들고 주워온 돌맹이들로 솔이가 한올한올 가슴털(?)을 붙였다.

오늘 퓔받았는지 제부가 이글루도 만들고 싶어해서 토토로 뒷쪽을 확장하기로. 토토로 등을 조금 파내고 주변으로 벽을 쌓아 올렸다.

한줌한줌 장인정신으로..
한줌한줌 장인정신으로..

막둥이가 한땀한땀 붙여 와꾸를 만드는동안 제부는 마당의 눈을 박박 퍼다 나르고 나는 그 눈으로 벽을 보강했다. 솔이는 단단해지라고 분무기로 물을 뿌렸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각자 알아서 분업.(다들 이글루를 원했던게야. ㅋㅋ) 지붕을 덮는게 어려워 길가에 나가 억새풀도 뜯어왔다. 돌아보니 정말 진심을 다했구나 ㅋㅋ

이글루 지붕 공사
이글루 지붕 공사

작업은 해가 떨어지고 어둑어둑해져서야 끝이 났다. 아이고 어깨 허리 등이야. 그래도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하고 나니 세상 뿌듯!

다음날 아침이 되니 등 근육이 뻐근했다. 솔이애민 전완근이 아프다고 궁시렁. 밤새 바람이 많이 불었는지 눈이 녹아 돌맹이들이 다 떨어져 나갔다. 눈이 그치고 오후엔 해까지 들고나면서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일어나자마자 눈사람부터 체크
일어나자마자 눈사람부터 체크

녹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우리 마당에 있으니 누가 지나가다 부수거나 망가뜨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눈사람이 녹아 없어지는 건 슬프지만 매일 조금씩 녹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덜 가슴 아팠다고나 할까. 눈사람은 우리가 공을 다한만큼 천천히 조금씩 녹았다. 조금씩 조금씩 녹아서 몇일 뒤 의자만 남았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안녕
안녕

No. 4

송자매랑 함께 만든 눈사람. 사공이 많아서 산으로 간 눈사람 되시겠다.

송자매가 온 뒤로 해안가에는 눈이 다 녹아서 차를 타고 중산간으로 다 같이 눈 구경을 나섰다. 무작정 산 쪽으로 달리다 차를 멈춘 곳은 남의 집 귤 밭 진입로. 며칠 동안 쌓인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채로. 그냥 밟아보려고 내렸는데 워메 눈이 너무나 잘 뭉쳐지는 거! 정말 눈사람 만들 생각 1도 없었는데 어느새 눈 말고 있는 나.

 멍석 made of 눈
멍석 made of 눈

술술 말리는 눈을 보고 겨울이가 다른 한 덩어리를 말기 시작했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큰 눈덩이 두 개가 생겼다. 덩어리가 커지니 처음에는 관심 없던 썰매팀 어린이들도 와서 거들었다. 다 같이 힘을 합쳐 머리를 올리고 울퉁불퉁한 부분을 깎아내 모양을 다듬었다. 지푸라기와 흙으로 범벅된 더러운 몸뚱이도 하얀 눈으로 한 겹 덮었다.

다 같이 힘을 합쳐 응차!
다 같이 힘을 합쳐 응차!

깨끗해진 눈사람을 각자 원하는 대로 꾸몄다. 하얗게 메이크업을 하고 귤껍질로 볼터치(?)도 해줬다. 목도리를 둘러주고 단추도 달아줬다. 이상한 귀를 달아주고 머리에 안테나를 꽂았다. 누군가 말했다.

“사공이 많아..”

메이크업 중
메이크업 중

덩치는 크지만 왠지 귀여운 눈사람 완성. 텔레토비 같기도 하고 피글렛 같기도 하고..

사공이 많아 산으로 간 눈사람
사공이 많아 산으로 간 눈사람

눈사람 하나 뚝딱 만들고 우리는 다시 갈 길을 간다. 차 다니는 길이라 조만간 부서질 것 같지만.. 즐거웠어.

외로워 보이네
외로워 보이네

며칠 뒤 지나가면서 보니 눈은 다 녹고 눈사람도 다 망가져 흔적만 남아 있었다.

안녕
안녕

No. 5

마지막으로 예자매가 만든 눈사람을 소개한다. 이날은 아예 눈사람 만들 작정을 하고 나섰다. 대충 굴려서 눈코입 다는 눈사람이 아니라 각자 만들고 싶은 작품을 미리 마음에 두고 준비했다. 쓸만한 도구를 챙기고 화룡점정을 위해 김을 준비했다.

일단 눈이 아주 많은 곳으로 가야 했으므로 한라산으로 향했다. 성판악 주차장에서 만들려고 했지만 차량 통제로 주차장에 못 들어가고 내려오는 길에 아주 기가 막힌 곳을 발견했다.

사실 한라산 어딜 가나 눈은 지천에 널렸지만 차를 세울 곳이 없어서 문제였다. 근데 여긴 딱 차 두어 대 세울 수 있을만한 공간도 있고, 그 옆엔 제설차가 쌓아놓은 산더미 같은 눈 뒤로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이 족히 50cm 정도는 쌓여있었다. 게다가 높게 쌓인 눈 때문에 길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요새 같은 공간. 그리고 그 위로 또 눈이 내리고 있었으니 모두 최고로 흥분 상태.

각자 자리를 잡고 뭔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현자매는 화장실을 만들고 예자매는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

한 시간쯤 지났나. 현자매는 화장실 공사를 다 끝냈는데도 예자매의 눈사람은 지지부진한 상태. 오늘 안에 끝날 것인가?

눈사람 장인이 나섰다. 더 이상 안 커진다는 겨울이의 곰돌이 친구 하앙이를 벌크업 시켜주고, 라이언 몸통만 붙들고 씨름하던 딸기에게 라이언 머리통을 하나 동그랗게 말아줬다. 몸뚱이와 얼굴뿐이던 솔이의 토끼 친구 토고에게 나뭇가지 뼈대로 귀와 팔을 만들어 줬다. 이제 마무리 조각하고 눈만 달아주면 끝. 해도 떨어지고 눈발도 흩날리는데 예자매는 꿈쩍도 않고 각자 작품 활동에 집중했다.

그렇게 두 시간 만에 완성된 작품들.

하지만 이걸 두고 떠나야 한다. 공을 많이 들여서인지 유난히 아쉽다. 나도 아쉬운데 예자매는 얼마나 더 아쉬울까.

눈을 뭉쳐 눈코입을 붙이는 순간, 생명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집에 데려갈 수도 다시 볼 수도 없는 눈사람. 그리고 다시 보잔 말도 잘 지내란 말도 할 수 없는 이별..

지들끼리 실컷 사진이나 찍으라고 한참을 기다렸다. 마지막까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결국 그곳을 떠나왔다.

며칠 뒤 서귀로포 넘어가던 막둥이가 보내온 사진. 눈은 다 녹고 눈사람들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안녕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