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예보 해님. 이것은 나가라는 신호. 간만에 한라산에 가기로 했다. 서귀포에서의 선택은 두 가지. 서쪽에 있는 영실 어리목 또는 동쪽에 있는 성판악. 영실 어리목은 풍경이 멋지고 비교적 쉽고 짧다. 성판악은 백록담을 볼 수 있고 거리가 길고 지루하다. 아, 최근에 바뀌어 영실은 그냥 가면 되고 성판악은 예약을 해야 한다.
뭐 그렇긴 한데 사실 오늘의 선택 기준은 이런 거 보다 편리한 교통 편이었다. 서귀포에서 버스를 타고 가기 편한 곳. 영실은 버스를 한 번 갈아타야 했고 성판악은 바로 가는 버스가 있어서 성판악 당첨. 급하게 한라산 탐방 예약 시스템에 접속해 방문 예약. 날씨 때문인지 수요일이 다른 날에 비해 월등히 예약자가 많았다. 그래도 평일이라 마감은 안돼서 980번대로 예약 완료.
6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채비하여 6시 30분 출발. 서귀포 버스터미널 정류장에 도착하니 7시 10분 전. 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 가려고 했는데 문 연 편의점이 없어서 빈손으로 7시 버스를 탔다.
성판악에 내린 시간 7시 40분. 매점에 들러 김밥 한 줄을 샀다. 먹어봐서 아는 맛없는 김밥이지만 선택이 없었다. 산에 가서 먹으면 뭐든 맛있어지니까 이런 게 팔리는 거지. 카드를 내니 구시렁 구시렁대서 한 판 할 뻔.
신발 끈을 동여매고 출발. 바코드 찍고 개찰구 같은 곳으로 들어간다. 웬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시장 도떼기 같은 분위기에서 출발해 줄을 서서 걸을 지경.
사람들을 벗어나기 위해 처음부터 속력을 좀 냈다. 그러고 보니 한라산에 혼자 온 건 처음이라 오늘은 온전히 내 속도대로 걸어보기로 했다.
성판악 탐방로는 철저하게 탐방로를 따라가야 하는 구조이다. 탐방로 옆으로 벗어날 수 없고 앉아 있을 곳도 없다. 엉덩이라도 대고 앉으면 길이 좁아 보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힘들때 탐방로 한쪽 구석에 서서 숨 돌리는 정도다. 중 간에 두 세 군데 쉴 수 있는 공간이 있긴 하지만, 앉아서 맘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 바로 대피소다. 성판악 코스에는 속밭 대피소 와 진달래밭 대피소 두 개가 있다. (우리나라는 왜 휴게소나 쉼터, 오두막 같은 말을 두고 대피소라는 말을 쓰는 건지 모르겠다) 이 두 개의 대피소를 오늘의 마일스톤으로 잡았다. 열심히 걷고 휴게소에선 무조건 쉬어가기.
성판악에서 속밭대피소까지는 거리 약 4.1km 난이도 쉬움. 대략 한 시간 걸린다. 성판악 코스가 전체적으로 완만하긴 하지만 특히 성판악에서 속밭대피소까지는 산책로 정도로 경사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지난번에 왔을 땐 너덜길이었는데 이번엔 돌 위에 멍석(?)을 깔아두어 걷기가 한결 수월했다.
속밭 대피소에 도착하자 반팔로 걸어도 될 만큼 몸이 데워졌다. 옷을 벗어 배낭에 넣으려니 부피와 무게가 꽤 나갔다. 등산 배낭이 아닌 일반 배낭이라 허리 끈도 없어 온전히 어깨로만 매야 하는데 오늘 어깨가 고생좀 할 듯 하다. 오늘의 롱 초이스. 뭐 제주에 매고 온 배낭이 이거니 다른 선택이 없긴 했지만. 개인 정비 하고 다시 출발.
속밭 대피소에서 진달래 대피소까지는 약 3.2km. 난이도는 경사가 좀 있어선지 어려움. 경사가 있지만 길이가 짧기 때문에 소요되는 시간은 성판악 - 속밭대피소 구간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듯.
사라 오름을 지나자 중간중간에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탐방로 밖에만 눈이 쌓여 있길래 무겁게 아이젠 괜히 가져왔나 싶었는데 조금 더 올라가니 다행히(?) 탐방로에도 아이젠을 끼고 걸어야 할 만큼 눈이 많이 쌓인 구간이 있었다.
출발할 때에 비해 확실히 사람이 줄었다. 출발할 때는 칙칙폭폭 줄 서서 걸었는데 이젠 앞쪽으로 한 두 팀만 보일만큼 길이 한산해졌다.
2시간만에 진달래 대피소에 도착했다. 이 구간 좀 힘들었다. 앉아서 5분간 휴식. 에너지바 하나 까먹고 다시 출발.
이번은 정상까지. 2.3km 거리에 난이도는 보통. 산소가 부족해선지 마지막 구간이어선지 확실히 속도가 느려졌다. 길 옆에서 쉬는 사람들도 가장 많은 구간. 이 구간에 눈이 많아서 아이젠을 가져오길 잘했다 싶었다. 물론 중간에 녹은 데가 많아 아이젠을 끼었다 벗었다를 반복해야 했지만. 햇빛은 쨍, 반팔 입고 눈 덮인 산을 걷는 기분이라니.
걸음이 느려진 건 힘들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멋진 풍경 때문이기도 하다. 뿌예서 원거리 조망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파란 하늘에 대비되는 하얀 고사목 풍경은 여전히 멋졌다.
산에서 귤 계란 고구마 바나나 까먹고 거름이랍시고 껍질 아무 데나 버리면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그래도 거름이라고 생각한다면 자기 집에 가져다 뿌리던가.
출발한 지 세 시간 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진달래 대피소에서 딱 한 시간 걸렸다. 속밭 대피소까지 한 시간 진달래 대피소까지 한 시간 정상까지 한 시간. 한 시간에 한 번씩 쉬기로 했는데 휴게소를 적당한 구간에 딱 잘 만들어놓은 듯.
김밥을 까먹고 백록담도 확인했으니 이제 하산. 관음사로 갈까 하다가 역시 버스 갈아타기가 귀찮아 성판악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뒤를 돌아보니 정상엔 사람들이 한 가득이다. 올라갈 때보다 훨씬 많아졌다. 아직 올라오는 사람들이 꽤 많다. 6시에 출발해 9시쯤 도착하면 사람이 거의 없지 않을까 싶긴 한데 문제는 대중교통으로 6시에 성판악에 도착할 방법이 없다는 것. 그리고 10시쯤 하산하면 올라가는 사람들에 치일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그런 날이 언제인지 알 방법이 없다.
내려가는 길엔 방향도 그렇고 여유도 생겨 풍경이 눈에 더 잘 들어오는데 오늘은 조망 꽝. 날씨 분명 맑음인데 왜 이리 뿌연지 제주 시내는 아예 보이질 않았다. (버스 타고 집에 올 때 보니 한라산이 아예 안 보이더라.) 백록담은 보았으나 멋진 조망을 보지 못했으니 오늘 산행은 50점 되시겠다.
사라오름
아. 하산길에 사라 오름 사이드 트립. 사라 오름은 백록담 가는 길 중간에 있는데, 올라가는 길에는 정상까지 가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내려오는 길에는 다시 오르막을 올라가기 싫어서 늘 패스했던 곳이다.
계단을 몇 개 오르자 펼쳐진 호수뷰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잠시 시간이 멈춘 어떤 다른 세계에 온 같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 바람과 찌릉찌릉 새 소리 뿐. 오가는 바쁜 등산객도 없다. 그림 같은 풍경속에서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은 평화로움. 정말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고요함이었다. 나도 모르게 호수가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둘레로 난 데크길을 걸어 사라 오름 전망대에 오르자 멀리 한라산 정상이 보였다. 보통의 하산길엔 휴식이 없지만 여기선 무조건 쉬어가야 해.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일광욕. 아쉬웠던 산행이었는데 이 시간으로 인해 만족도가 쭉 올라갔다. 안 왔으면 어쩔뻔.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추리닝을 입고 갔더니 데크의나무 가시가 옷을 파고들어 자꾸 찔러대서 오래 못 앉아 있었다는 점. 돗자리 들고 다시 와야겠다.
무사히 성판악 휴게소에 도착하니 14시 30분. 올라가는 데 3시간 정상에서 휴식 1시간 내려 오는데 3시간. 총 7시간이 걸렸다. 하산 3시간에는 사라오름 전망대 왕복 45분이 포함되어 있다. 혼자라서 좀 빨리 갔다 빨리 내려온 듯.
하루종일 반복되는 걸음에 지쳤을 다리를 풀어주고 버스 정류장으로. 성판악에서 서귀포로 오는 버스는 281번, 181번 두 개가 있는데 자주 오는 편이다. 181번은 급행이고 281번은 완행인데 급한 일 아니면 아무거나 타면 되니 보통 10-20분 정도만 기다리면 된다.
이제 성판악 주차장 주변 길가엔 차를 못 세우니 국제대학교 주차장을 이용하라는 안내표지. 버스가 자주 다니니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서귀포 시내에 와서 장 봐서 숙소로. 서귀포 구시가지에 살 땐 잘 몰랐는데 신시가지는 그냥 다 오르막이다. 발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십자가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줄.
이렇게 하루 산에 갔다 오면 몸은 피로하지만, 온 몸의 근육을 구석구석 다 쓴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등산은 살아있음을 느낄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인 것 같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