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mply Me
함께 걸은 겨울이에게
5 Mar 2021
13 minutes read

안녕 겨울아!

너는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함께 걸었던 가장 오랜 기억이 있어. 2012년 1월, 호주에 살던 이모가 한국에 놀러 왔을 때 함께 제주로 여행을 떠났었지. 우리는 다 같이 제주의 올레길 1코스를 걸었어. 초롱 민박에서 아침을 먹고 시흥초등학교에서 시작해 말미오름과 알오름 오름을 두 개나 올랐잖아. 손 흔드는 갈대밭도 지나고 당근밭도 지났지. 목화 휴게소에서 꿀빵도 사 먹었고. 그때가 겨울이 5학년 때였지 아마. 딱 9년 전의 일이야.

그리고 같은 해 호주에서 함께 걸었던 그레이트 오션 워크! 제주도 올레길을 걸은 후 이모는 걷기에 재미가 들려 호주에서도 주말마다 부시워킹을 하고 있었거든. 너희들과 걸으려고 남겨뒀던 그레이트 오션 워크의 마지막 구간을 겨울이랑 이모가 함께 걸었지.

멋진 바닷가의 절벽을 따라 걷던 그 풍경 기억나? 왈라비도 만나고 고슴도치도 만났었지. 겨울이가 다리 아프다고 힘들다고 못 걷겠다고 할까 봐 내내 엄청 조마조마했었는데 넌 힘들어하면서도 불평 한 마디 없이 그 길을 다 걷고야 말았어. 혼자 걸어도 좋은 길이었지만 호주의 멋진 풍경을 겨울이랑 같이 볼 수 있어서 이모는 너무나 즐거웠던 기억이 나. 함께 해서 더욱더 좋았던 길이지.

그로부터 9년 후. 2021년 3월. 초등학생이던 너는 대학생이 되었고 이모는 어느덧 40대 중반이 되었어. 이모는 지난 9년 동안에도 끊임없이 어딘가를 열심히 걸어 다녔어. 이번에도 제주에 겸사겸사 걸으려고 떠난 참이었지. 친구들과 이틀을 함께 걷고 각자의 일정대로 평대에서 헤어졌어. 딱히 더 걷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이모는 월정리에서 며칠 쉴까 하던 중에 니가 제주에 걸으러 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 거야. 그것도 혼자!

이모는 조천에서 시작해 동쪽으로 걷고 있었고 너는 공항에서 서쪽으로 걷고 있었으니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던 셈이야. 물론 제주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서귀포 어디쯤에서 만나긴 하겠지만, 옛 걷기 동지와 하루라도 빨리 함께 걷고 싶은 마음에 너에게 연락을 했지.

혼자 있고 싶은데 괜히 가서 방해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해서 사실 조금 조심스럽기도 했어. 조용히 혼자 걸으려고 왔는데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 찾아들면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이모는 싫을 거 같았거든. 그래서 혹시나 불편하면 각자 걷고, 먹고 자는 것만 쉐어 하자고 제안했는데 넌 흔쾌히 같이 걷자고 했어. (니가 싫다고 하면 사실은 생일 찬스를 쓸 생각이었지 하하!)

첫째날

너의 허가를 받은 다음날 아침. 늦어도 8시에는 출발을 하려고 했는데, 아침에 너무 힘든거야. 이모가 보여줬지? 월정리 김광석. 간밤에 너무 신나게 놀았는지 7시에 눈을 떴는데 술도 안 깨고 속도 안 좋고 도저히 몸뚱아릴 일으킬 수가 없는 거야. 하, 오늘 걸을 수 있을까? 한숨 더 자고 오후에 조인할까? 고민하다 보니 8시가 되었어. 안되겠다 가자. 몸을 일으켜 길을 나섰어.

월정에서 협재까지는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먼 길이야. 동쪽을 도는 101번 버스를 타고 제주 시내에 있는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제주 서쪽을 도는 202번으로 갈아탔어. 차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놓쳐서 20분 정도를 기다려야 했지. 다행히 속은 좀 나아진 것 같았어. 이제 날씨만 도와주면 될 듯.

너는 이미 숙소에서 나와 출발했고 이모는 중간에 버스에서 내려서 조인하기로 했어. 202번 버스는 수많은 정류장에서 정차하느라 안내방송이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시끄러운 완행 버스야. 버스가 협재를 지나 월령 포구쯤 왔을 때 혹시나 싶어 밖을 내다보니 저 멀리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 니가 보이는 거야. 오, 배낭을 메고 카메라를 드니 멋진 여행자 같은데? 멈춰 서서 사진을 찍고 있는 너를 이모가 탄 버스가 스쳐 지나갔지.

송겨울이닷!
송겨울이닷!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길을 되돌아가 해거름 전망대에서 너를 기다리기로 했어. 바람이 세차게 부는 전망대 언덕에 올라 멀리서 걸어오는 너를 향해 손짓을 하니 알아보고 손을 흔들어 주네. 어이 반갑구만! 자 이제 우리 같이 걸어볼까.

인증샷
인증샷

제주도 한 바퀴를 올레길이 아닌 자전거 도로를 따라서 걷는다니, 생각지도 못했던 신박한 발상이야. 올레길은 450km가 넘지만 자전거길은 250km 정도로 짧고, 외진 도로가 없어 안전하기도 하고 포장된 길이라 걷기 수월하기도 하지.

일정과 체력을 고려할 때 충분히 좋은 선택이야. 두리번거리며 리본을 찾을 필요 없이 바닥에 난 선을 따라가니 편하고, 올레길과 겹치는 구간도 많아 경치를 즐길 수 있지만 올레길처럼 꼬불꼬불하지 않기에 아무래도 덜 피로하겠지. 그러다 멋진 풍경을 만나면 올레길과 자전거길 중 원하는 길로 갈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시대적 흐름에 맞는 커스텀 길이지.

뭐 올레길이든 자전거 길이든 걸으며 천천히 제주를 즐기면 되는 거 아니겠어? 이모가 계획한 길에 널 데리고 걸었던 과거와는 달리, 이번엔 네가 계획한 커스텀 올레길을 이모가 따라가기로 했어. 암튼 인생은 살고 볼 일이라니까.

태극기 휘날리며
태극기 휘날리며

신나서 걷기 시작했는데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부는지 전봇대에 걸어둔 삼일절 태극기가 부러지거나 휘어져 길가에 나뒹굴 정도였지. 앞바람이 막아서니 전진하는 에너지가 배로 드는 것 같았어. 한참 걸은 것처럼 배가 고파지길래 시계를 보니 3km밖에 안 걸었네. 쩝.

제주도 서쪽은 동쪽에 비해 정말 황량해. 관광지가 없어서인지 자전거 도로에는 카페는커녕 편의점도 없는 데다 바람이 거칠어 자전거로 달릴 때마다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어. 해장도 해야 하고, 본격적으로 황량해지기 전에 한경면에 들러 점심을 먹고 가기로 했어.

너와 내가 좋아하는 고사리 육개장을 배불리 먹고 기분 좋게 식당을 나왔는데 비가 내리고 있네. 이런. 오후 내내 비가 온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믿고 싶지 않았는데, 눈앞에서 비가 내려 버리네 거참. 바람이 불어서 우산을 써봤자 소용없을 것 같기도 하고 굵은 비는 아니라서 그냥 비를 맞으면서 걷기로 했어.

이때만 해도 괜찮았지
이때만 해도 괜찮았지

흩뿌리는 비였지만 계속 맞고 걷다 보니 옷도 젖고 카메라도 젖고. 이내 가방도 젖을 것 같아서 우산을 꺼내어 방패처럼 막고 걸어야 했어. 비도 피하고 쉬어 갔으면 좋겠는데 어디 지붕 아래 앉아서 쉴만한 곳도 없었지. 오랜만에 나타난 버스 정류장이 반가워 들어가 봤지만 비가 들이치고 의자도 모두 젖은 상태. 이모는 이런 상황이 견딜만하지만 니가 비에 젖을까 추울까 힘들어할까 봐 신경이 쓰였어. 내가 비를 뿌린 것도 아닌데 괜히 미안한 마음까지 들고 말야.

그래도 한동안 비바람에 맞서 힘차게 걸었어.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는 중에도 발은 자동으로 움직이는 상태. 한 시간 정도 걸었을 무렵 갑자기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어. 진작부터 가방에 넣은 카메라와, 배낭에 들어있는 노트북이 젖을까 봐 잠시 비를 피하기로 했어. 비를 가려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동네. 급하게 근처에서 지붕이 있는 건물을 찾아낸 것이 고산에 있는 한경면사무소야.

망할 입구는 왜 뺑 둘러 저 멀리 있는지, 고 몇백 미터를 걷는 동안 신발이 다 젖었어. 으악. 절대 젖으면 안 돼, 하루 종일 조심조심 걸으며 사수해 온 신발인데. 허둥지둥 걷는 동안 걸음마다 철퍽철퍽 소리가 날 정도로 아주 폭삭 젖어버렸네. 빗소리 때문인지 갑자기 오줌도 마렵고. 하. 안절부절 화장실을 찾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지만 공휴일이라 문을 닫은 관공서 앞에서 좌절해야 했지. 결국 화장실을 못 찾고 계단 아래 몸을 피해 일단 막둥이한테 SOS를 쳐두고 숙소를 알아보기 시작했어. 고산에 있는 숙소 여러 군데 전화를 해봤지만 모두 만실. 제주에 널린 게 숙손데 오늘 왜 이래? 신발이 젖고 오줌이 마려운데 화장실을 못 찾으면 멘탈이 나가더라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어.

비에 젖은 너와 나
비에 젖은 너와 나

혼자라면 뭐든 내 맘대로 하고 고생도 혼자 하면 되지만,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은 상대의 생각과 마음과 상태를 고려해야 하는 일이야. 그저 같이 걸을 생각에 신나서 얼마나 걸을 건지, 어디서 잘 계획이었는지, 비가 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지 등을 모른 채 그냥 좋다고 열심히 걸었더라고. 뒤늦게 깨닫고 너 혼자였다면 어떻게 했겠니?라고 물으니 택시를 타고 예약해둔 숙소로 갈 거 같대. 참으로 쿨한 대답이었지. 일단 이모 때문에 예약을 안 했으니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 택시를 탄다는 것도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지. 이모가 혼자였다면 아마 비가 조금 내리기 시작했을 때 이미 걷기를 그만뒀을 거야. 아니면 숙소를 알아보며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거나, 막내 이모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같이 그 집에 갔겠지.

오늘은 뭐든 네 방식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반경을 넓혀 숙소를 알아보고 택시를 타고 움직이기로 했어. 이미 이모는 젖은 신발과 터질듯한 오줌보로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겨울이가 이 모든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대처해 주어서 정말 고마웠어. 오줌마려 동동거리는 이모를 옆에 두고 핸드폰으로 신속하게 숙소를 알아보는 너. 든든하더라니까. ㅋㅋ 가까스로 멀리 대정에 있는 숙소에서 빈방을 찾아내 전화로 급히 예약을 하고 택시를 불렀어. 젖은 몸으로 택시를 타는데 기사님께 죄송하더라. 주머니에 손수건도 쫄딱 젖은 상태라 닦을 것도 없고. 젖어서 죄송하다고 웅얼거리며 타서 쥐 죽은 듯 있다가 감사하다 소리치고 도망치듯 내렸지.

한참 걷고 있어야 할 오후 세 시에 숙소에 도착했어. 하얀 지붕의 단정한 건물과 네모 반듯한 마당을 보니 음 오늘 숙소 잘 골랐다 싶었지. 체크인을 하고 숙소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막내 이모가 왔어. 알고 보니 솔이네가 전에 왔던 숙소라고 하니 이 무슨 우연이야. 그 많던 숙소가 다 만실이던건 결국 우리가 여기에 오기 위해서였나? 오늘 손님이 없어서 모처럼 외출하시려다 전화가 왔길래 안 받으려다 받았는데 그게 우리 전화였다지. 그저 깨끗한 2인실을 찾았을 뿐인데 독채를 쓸 수 있는 데다가 아침엔 한정식 수준의 조식까지 준다고 하니 결국 우리가 럭키한 거 아니겠어?

행복한 순간, 비에 젖은 여기 지금 우리
행복한 순간, 비에 젖은 여기 지금 우리

방에 들어와 젖은 신발을 벗고 볼 일을 보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으니 평화가 찾아왔어. 그제서야 예쁜 숙소가 눈에 들어왔지. 깔끔한 내부 인테리어에 한옥의 느낌이 살아있는 아기자기한 방. 무엇보다 뒷뜰로 난 창문이 너무너무 예뻤지.

물에 푹 젖은 신발을 대충 닦아 널어놓고 니가 빌려준 아쿠아슈즈를 신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어. 오일장을 구경하고 배불리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니 조용한 숙소엔 우리뿐. 너는 그림을 그리고 나는 그런 너를 구경하고 젖은 신발을 걱정하며 남은 밤을 보냈어. 원래 하루만 너를 방해하려고 했는데 오늘 실컷 못 걷고 일찍 파한 게 조금 아쉬워서 내일도 함께 걸으며 오늘의 아쉬움을 달래기로 했어. 그나저나 내일 아침 마른 신발을 신을 수 있을까?

둘째날 아침

간밤에 열심히 말린 덕분에 신발은 그럭저럭 신을 수 있는 상태가 됐어. 그런데 어제와 달리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졌네. 하나라도 짐을 덜겠다고 어제 막내 이모 편에 패딩을 보내버렸는데 말야. 있는 옷 없는 옷 다 껴입고 길을 나섰어.

아참, 숙소의 아침 식사가 정말 훌륭했지. 오일장에서 사 오셨다는 생선구이 (조긴 줄 알았는데 새끼 대구라고 하셨지 아마), 가지 조림과 호박전, 정갈하게 말린 계란말이에 텃밭에서 따셨다는 쌈 채소까지. 어느 하나 덜한 것을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모두 하나같이 맛있었어. 돈을 주고도 사 먹을 수 없는 정성스러운 아침 밥상이었지. 덕분에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기분 좋게 출발!

낮게 내려앉은 구름을 보며 시작했는데 한 시간쯤 걸었나, 모슬포 항을 지날 때쯤 먼바다의 구름이 걷히고 파란색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어. 회색 구름이 걷히자 바다도 파란 빛깔이 돌고 수평선이 선명해졌어. 어제보다 바람도 덜하고 무엇보다 비가 안 오니 기분이 계속 업업업!

점점 드러나는 파란 하늘
점점 드러나는 파란 하늘

하모 해변을 지나자 멀리 산방산과 그 뒷배경으로 한라산이 눈에 들어왔어. 한라산 꼭대기에 하얗게 쌓인 눈이 보일 만큼 선명했어. (판지 마늘인지) 드넓은 초록색 밭 너머로 보이는 산방산과 한라산. 우리는 계속 감탄하며 연신 사진을 찍으면서 걸었어. 자연은 모두 아름답지만, 초록과 파랑과 노랑이 특히 기분을 좋게 해주는 것 같지 않니? 그 모든 색을 가진 것이 바로 제주의 풍경이란 말이지.

산방산과 한라산
산방산과 한라산

송악산을 향해 걷다가 사람이 더 많아지기 전에 조용한 곳에서 쉬었다 가기로 했어. 배불리 먹은 아침 덕분에 점심이 늦을테니 오전에 티타임을 가지는 것도 좋을 것 같았거든. 그리고 딱 봐도 이 집 왠지 뷰가 좋을 것 같기도 했고. 우리는 각자 음료를 하나씩 들고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 앉았어. 우리가 들어갔을 땐 아무도 없었는데 곧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지. 너는 수업 들으랴 화장실 다녀오랴 분주했지만 이모는 아주 평화로운 시간을 가졌단다.

카페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좋았지만 사실 더 좋았던 건 사일리 카페를 나온 뒤였어. 카페 뒤로 난 길에서 바라본 송악산과 바다. 캬, 바다색깔 진짜 최고였지. 호주의 바다보다도 강렬하고 아름다운 색깔이랄까. 이런 풍경을 보면 이모는 기분이 좋아져. 어찌나 기분이 업 되었는지 좀만 더 힘주면 날아오를 것 같더라니까.

멋진 풍경과 넘 신나 날아갈 것 같은 이모
멋진 풍경과 넘 신나 날아갈 것 같은 이모

하모 해변부터 송악산 주차장까지가 바람도 많이 불고 은근 오르막이거든. 자전거로 달릴 땐 참 욕 많이 하면서 달린 길인데, 오늘 걷는 길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더구나. 무엇보다 압권은 그 오르막이 끝나는 지점에서 펼쳐지는 풍경이었지.

바로 이 풍경
바로 이 풍경

그리고 그보다 더 좋았던 건 사계리 해안을 따라 걷던 올레길이었어. 짧은 구간이었지만 우리 사진 정말 많이 찍었지. 바로 옆으로 난 자전거길로 여러 번 달려봤지만 자전거길에서의 느낌과 올레길의 느낌이 확연히 다른 구간이었어. 올레 리본을 따라가야만 볼 수 있는 풍경이랄까.

그리고 노란 유채꽃밭 너머로 보이는 우람한 산방산 풍경. 왜 꽃밭으로 안 가고 둘러 가나 했는데 올레길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지. 그야말로 그림 같은 풍경에 감탄이 절로 나왔어.

산방산 하멜 기념비를 살짝 넘어 황우치 해변의 덤불길에서 모래바람을 만났을 땐 호주의 그레이트 오션 워크를 걷던 때가 생각났어. 그리고 바닷가에 쌓인 바위들을 지나 도착했던 해변 기억나지? 이 이름 없는 해변이야말로 올레길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장소였어.

조용한 바닷가에 가만히 앉아서 느끼는 따스한 햇빛. 멋진 풍경을 충분히 즐기며 놀멍 쉬멍 걷는 오늘. 이 멋진 곳을 오늘처럼 멋진 날씨에 걸을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 그리고보면 어제같은 궂은 날씨에 그곳을 걸은 것도 감사한 일이지. 그래서 오늘 여길 걸을 수 있으니 말이야. 이런 멋진 곳을 겨울이와 이렇게 함께 걷고 있으니 으아 행복하고도 기쁘도다.

이름 없는 해변에서
이름 없는 해변에서

올레 10코스의 매력을 이제서야 알게 된 것 같아. 자전거길만 따라갔다면 만나지 못했을 감동이야. 올레길을 빼두고 제주를 말할 수 없고 제주도 올레길은 더없이 멋진 길이지만, 이모는 올레길 완주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 게 맞을 거야. 누가 정해둔 길을 따라가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길을 걷는 게 좋잖아. 올레길을 걸으면 풍경에 집중하지 못하고 리본을 찾아야 하는 것도 은근 신경 쓰이고, 필요 없이 빙 둘러 간다거나 원하지 않는 곳을 걸어야 할 때도 있어. 걷고 즐기는데 에너지를 온전히 쏟지 못하는 것 같아서 리본 따라 걸으며 도장 찍기는 하지 않기로 했었거든. 자전거길이랑 겹치는 구간도 많고 자전거를 달리면서도 충분히 풍경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근데 오늘 걸어보니, 물론 제주의 멋진 풍경은 자전거를 타거나 차를 타고도 충분히 느낄 수 있지만 걸어야만 보이고 느껴지는 것들이 있더라고. 언덕 너머에 숨겨진 해변 산책로라던가, 갯바위를 지나야만 만날 수 있는 비밀스러운 해변 같은 곳들. 오늘 걸었던 10코스는 꼭 다시 한번 걸어야겠다 싶었어. 날 좋은 가을쯤 올레길을 쭉 이어서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싶고.

늦은 점심을 먹고 기분좋게 중문으로 향했어. 올레길로 걸으면 좋았겠지만 솔이랑 만나기로 한 시간을 맞추지 못할 것 같았고, 그러자고 자전거길로 걷자니 안덕에서 중문까지의 자전거길은 4차선 대로를 따라가는 길이니 차라리 버스를 타고 가자고 이모가 제안했지. 제주에서 걷는 목적을 생각할 때 소음과 매연속에서 차길을 걷는 것 보다 차량의 도움을 받아 아낀 시간을 바닷가에서 여유롭게 보내는 게 낫지 않겠냐는 논리로. 너도 별 망설임 없이 흔쾌히 응했어.

그렇게 중문으로 가는 버스에서 네가 예전에 찍어둔 숙소를 예약했어. 나름 오션뷰 호텔인데 4만8천원. 만원도 안 하는 항공권에 오만원도 안 하는 호텔이라니. 우리 진짜 천국에 살고 있구나.

이른 시간에 걷는 일정이 끝났지만 솔이랑 함께하는 저녁 시간이 있었지. 숙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솔이네랑 함께 숙소 뒤에 있는 베릿네 오름도 오르고 바닷가에서 일몰도 함께 봤어. 좋아하는 겨울 언니랑 매일 저녁을 같이 보낼 수 있어 솔이도 너무나 좋아하고, 겨울이도 즐거워하고, 그런 너희들을 보니 이모들도 좋고. 제주에 와서 함께 걷길 참 잘했다 싶다.

셋째날 아침

다음날 아침. 숙소를 나서니 상쾌한 공기가 우리를 맞았어. 이제 헤어질 시간이야. 너는 계속 가던 길을 걷고, 이모는 서울로 돌아가야 해. 오늘도 한라산 꼭대기가 선명하게 보이네, 날이 좋아 넘 다행이다. 내일 또 비가 온다니 오늘 실컷 걷도록 해.

짧은 이틀이었지만 같이 걸을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았어. 멋진 풍경 속에 너를 함께 담을 수 있어서 좋았고, 같이 고생하고 두고두고 울궈 먹을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어서 뿌듯하고 기뻐. 이모랑 함께 걸어줘서 고마워.

이제 혼자 걸으렴. 더 큰 자유와 평화를 느끼게 될꺼야. 멋진 풍경을 가슴에 담고, 너 자신과의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봐. 혼자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건 날개를 단 것과 다름 없어.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거든. 네가 원하는 곳에서 너만의 속도로 걸으며 즐길 수 있으면, 혼자 걷는 것도 함께 걷는 것도 모두 즐거운 일이 될거야.

고독과 자유를 만끽하는 청춘의 날들이 되길 바라며.

2021년 3월
너를 응원하는 큰이모가